2011년 9월 24일 토요일

권력분립

오랜만에 대학동기들과 만났습니다. 모두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돌아오는데 문득 느껴지는게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일에 대해서 정말 아는게 없구나 싶더군요.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자기의 일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살게 되는 것이죠.
그 생각을 하다가, 권력분립문제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저희가 일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통제장치들이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각종 감사-저희 부의 자체 감사/ 감사원의 감사/ 국정감사-도 받고, 개별사건에 대해서는 행정심판/행정소송에서 다뤄집니다. 그러니 저희 일을 아는 사람들이 꽤 많을 듯 싶지만, 저희가 보기엔 전혀 아닙니다. 물론 비리도 잡아내고 권익구제도 합니다만, 지켜보고 있자면 저 분들이 저희 일을 깊숙히 꿰뚫어보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일을 하다보면 정말 어찌해야 할 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물어볼 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저희도 외국인문제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만, 저희보다 잘 아는 곳이 아무데도 없거든요. 저희를 통제하는 곳은 많아도, 저희보다 잘 아는 곳은 없습니다.

결국 저희 일은 저희 밖에 모른다는 결론이 됩니다. 아마 저희만 이렇지는 않을 겁니다. 거의 모든 분야가 이렇게 되고 있는 듯 합니다. 밖에서는 건드리고 싶어도 몰라서[그런 분야가 있는지, 있다면 무슨 일들이 문제가 되는지, 문제가 된다면 어떠한 선택사항들이 있는지] 못 건드리게 되는.

헌법학에서 고전적 권력분립론의 위기라는 내용이 나오죠. 이제 실감이 납니다. 사회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복잡하게 되어, 저희가 완전히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데[현실을 완전히 파악/통제하고 있지 못합니다], 국회나 법원은 저희도 못 따라잡고 있다[행정부의 업무를 완전히 파악/통제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이를 보면, 지금은 소수의 집단이 국가를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해외 유학생의 절대 다수가 미국으로 유학가는 군인이었다죠. 미군은 2차대전을 치르면서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관리해야 했고[보통 군이라면 총쏘고 싸우는 것만 생각하지만, 세계대전에서는 인력의 모집/훈련/배치, 장비 및 물자의 조달/배분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는군요], 그 과정에서 행정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군유학생들이 이를 배워온 것입니다. 그러나 군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여기에 맞설만한 역량이-질과 양 모두에서-없었고, 이는 군사독재의 지속이 가능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죠. 이제는 설사 쿠데타가 성공한다 해도, 군에서 국가체제 전체를 유지/관리할 능력은 없는 듯 합니다.

군 뿐만이 아닙니다. 기성 정치질서에 반기를 드는 신진세력이 대선과 총선을 휩쓴다해도, 국가경영능력의 부족으로 곧 주저앉아버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독재도 혁명도 불가능해진 시대가 된 것이 아닐까싶어요.

더구나, 이제는 국가가 사회 모든 분야를 다 아우르지 못하는 시대가 온 것도 같습니다. 단순히 국가의 통제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서서[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던 시대가 있었는지 자체가 의문입니다만], 국가가 전문성의 부족으로 손도 대지 못하는 분야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분들은 '자본의 위력'이란 말을 써가면서 경계심을 나타내기도 합니다만.

이제는 어찌될까요? 아마 과거와 같은 국가기관에 따른 3권분립이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바탕을 둔 권력분립이 이뤄질 것 같습니다. '다원성'이란 점에서 헌법학의 '포괄적 권력분립론'과도 통하는 면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제가 그 쪽을 잘 몰라서 뭐라 말을 못하겠네요.
이미 우리사회에서 법조/의료/외교/군/금융/언론계 등이 파워엘리트로 군림하고 있죠. 각 국가기관/사회분야를 넘나들면서요. 예컨대 고위 군 장성이 전역 후 국방장관을 거쳐 국회의원이 되어서 국방위원회에 있는 일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법조계/언론계 인사들도 행정부와 입법부를 넘나들고 있죠. 이들은 여당과 야당 모두에 있으면서, 당파적 이해때문에 서로 대립도 하지만 때로는 당파를 떠나서 뭉치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3권분립이라는 말보다는 사회세력들이 권력을 나눠가지고 있다는 게 맞을 겁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세력들이 여기에 참여하지 않을까요? 물론 모든 세력이 저렇게 되기는 힘들겠고, 저런 메인 파워엘리트 그룹 밑에 서브 파워엘리트 그룹으로 지분을 나눠갖게 되지 않을까요? 사회의 변화에 따라 세력구도도 변해가면서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가지가 될 것같습니다. 먼저 해당분야의 전문성 또는 업무처리 능력. 또 하나는 해당 분야의 시스템 장악-바꿔말하면 정보의 장악. 저희같은 경우, 업무시스템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거기에 모든 정보가 들어있어서, 그게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죠. 아마 다른 국가기관도 비슷할 것으로 짐작합니다. 전문성이 없으면 정보가 있어도 그 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정보가 없으면 전문성이 있어도 추상적인 주장만 할 수 있지 실제 일은 할 수 없죠.

아마 우리세대가 죽기 전에, 지금까지의 권력분립론에 바탕을 둔 통치구조와는 상당히 다른 통치구조가 등장할 법도 합니다. 각분야별 파워엘리트들의 이합집산속에서 국가의 의사결정이 이뤄지면, 국가적 차원에서 어떤 목표를 향해 돌진하다가 파국을 맞는 일은 사라지겠지만, 도약적 발전 또한 힘들어지겠죠? 조용히 지켜볼만한 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