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9일 목요일

사람들에게 달동네는 어떤 의미일까요?

참 뒷골 땡기게 만드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8307.html

언론보도만 읽고 거품물고 흥분할 수는 없죠. 맞는지 틀리는지, 앞뒤 사정은 어떠했는지 알아봐야할 겁니다. 그런데 저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들을 읽어보다가, 뜻밖의 주장들을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이 저 어머니의 행동을 옹호하시더군요.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극빈자들이 사는 곳은 치안상황이 무척 나쁠 것이므로, 가장이 없는 것보다 저런 가장이라도 있는 게 나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저 어머니의 행동은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들도 하시더군요.

다른 건 모르겠고, 달동네에 대한 저분들의 생각을 보면서 저는 놀랐습니다. 달동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겪으셨기에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궁금해지더군요.

저는 다행히 굶어본 적도 없고, 달동네에 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달동네 바로 옆에서 자랐고,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제 국민학교 동창들은 봉천동의 달동네 아이들이 많았고, 중학교 동창들은 신림동 달동네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공업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고등학교 동창들도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도 많았죠. 제 고모들 가운데 두분이 서울에 사시는데, 한분은 답십리의 달동네에 사셨고, 다른 한분은 금호동의 달동네에 사셨습니다[두분은 다행히 재개발로 새집을 얻으셨습니다]. 지금은 재개발이 많이 되었지만, 요즘도 봉천동/신림동에는 달동네가 꽤 남아있습니다. 저는 밤에 달동네 골목을 걸어다닐 때도 많죠.

그런데 그 분들이 생각하시는, '10살짜리 의붓딸을 강간한 남자라도 있어야하는 ' 그런 곳은 본 적도 없고,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분들이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할 달동네를 겪으신 것인지, 막연하게 외국영화에 나오는 슬럼가와 같은 곳이 아니겠냐고 짐작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같은 시절을 살아가면서도, 서로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는게 아닐까. 어쩌면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없을 수 없지만, 불필요한 충돌말입니다-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입니다. 저도 집안에 아버지/남편이 있어야 한다는 것, 달동네 치안이 다른 곳보다 좋지 못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쓰레기 가장이라도 있어야만할 정도의 치안상황은 아니란 것이죠--

2009년 9월 8일 화요일

국제기능올림픽 우승 -기능반의 기억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search/YIBW_showSearchArticle.aspx?searchpart=article&searchtext=%ea%b8%b0%eb%8a%a5%ec%98%ac%eb%a6%bc%ed%94%bd&contents_id=AKR20090907117000004&search=1



우리나라가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우승을 했군요. 생각나는 게 있어서 좀 적어봅니다.


저는 공업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그곳엔 과마다 기능반이란게 있었죠. 기능경기대회를 준비하는 친구들이었습니다. 과마다 실습실이 있었는데[과실이라고 불렀습니다], 거기서 먹고자며 실습하는 게 그 친구들 일이었습니다.


대학입시에서 4당5락이란 말이 있던가요? 그 친구들도 거의 하루 서너시간 밖에 못자면서-그러다 보니 항상 눈이 풀려있었죠- 실습을 했습니다. 수업은 거의 빠졌죠.


인문계에서 공부만하면서 그리 지내도 지저분할텐데, 기름과 먼지가 뒤범벅이 되어서 그렇게 지내다보니 항상 거지꼴이었습니다. 제 동기였던 기능반 하나가 며칠만에 집에 가는데, 꼴이 하도 그러다보니 경찰이 불심검문을 하더랍니다. 다른 동기는 실습 도중 화상을 입어서 병원에 갔더니, 간호사 표정이 볼 만했다죠.

체벌도 심했죠. 교사가 아니라 선배나 조교[조교도 대개 몇년 선배]가 관리를 하다보니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야구방망이보다 굵은 몽둥이-누군가는 처음 봤을 땐 무슨 기둥인 줄 알았다죠-를 기름에 푹 담가두었다가[기름을 먹이면 더 무거워지죠. 옛날에 몽치를 오줌독에 담가두었던 것 생각하시면 됩니다] 패곤 했으니까요.

기능반출신이 군대에 가면, 군대구타 쯤은 우습더란 말이 있었습니다. 사실이더군요. 저는 경비교도대 출신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군대 내에서 구타로는 별로 밀리지 않는 곳인데[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군시절 추억담을 읽어보면 구타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우리보다 심했구나 싶은 곳은 아직 못봤습니다], 거기에 대면 별 것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제가 겪거나 지켜 본 곳 가운데 가장 구타가 심한 곳을 고르라면 공고기능반을 꼽을 겁니다.


그렇게 혹독하게 훈련하다보니, 자동차 엔진을 분해조립해서 시동거는데 40분 쯤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스탠드에 고정된 포니엑셀엔진이었는데, 크랭크축까지 들어낸 다음 다시 조립해서 시동거는 데 그 정도 걸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자기만의 공구를 만들고, 스피드핸들 돌리는 연습하고... 참 많이 애쓰죠.

자동차정비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이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오실 겁니다. 제 외삼촌께서는 공대를 나오셔서 자동차정비기사자격증을 가지고 계신데, 엔진분해조립시동을 40분대에 끝내는 애들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거짓말 말라고 하시더군요.


아무튼 이런 친구들이 지방기능경기대회에 나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입상하면 전국대회를 가게 되고, 거기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국제기능올림픽을 나가게 되죠[떨어지면? 과선생님들이 괜찮은 공장을 알아봐 줍니다]. 기능올림픽 준비는 학교를 떠나서 다른 곳에서 한답니다. 기능올림픽에서 우승을 하면 현대자동차연구소 같은 곳에 가게된다더군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서 좋은 직장에 들어간 선배가 양복을 빼입고 자랑스럽게 학교에 왔을 때, 친구들이 부러워하던게 생각나네요.


그런데, 그렇게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 하는 일은 뻔하다더군요. 연구원들이 연구 할 때, 이것저것 시키는대로 분해하고 조립하는 일 정도랍니다. 그래서, 어느 선배는 결국 공부해서 대학갔다는군요.


기능반이 아닌 학생들은 기능반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능반 애들이 생활하다보면 이런저런 쓸 곳은 있는데 돈 나올 곳이 없다보니, 학생들에게서 수시로 휴지나 비누 등을 걷어갑니다. 과실의 청소를 기능반 아닌 학생들이 맡는데, 이 때 기능반 선배들이 많이 때리기도 했죠. 1학년때만 있는 일이고, 2~3학년때는 이러지 않죠.

그러다보니 기능반 친구들이 기능경기대회에서 떨어졌을 때, 동기들이 별로 안타까워하지 않고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누군가는 쌤통이라고까지 하더군요.


그 곳을 떠나온지도 오래되어서 이젠 기억조차 흐릿해져갑니다. 개인적으로 고등학교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고, 지금까지 만나는 동기도 없어서 더할겁니다. 기능반은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일까요? 기능반에서도 떨궈진 친구, 기능경기대회 나갔다가 떨어진 친구, 우리를 패던 선배, 지금은 다 어디서 뭘할까요.

2009년 8월 15일 토요일

저주

뒷산에 갔다가 뭔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큰 도토리나무에, 한뼘 쯤 되는 허수아비 하나가 못 박혀 있더군요.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나오는 인종 방자하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돌을 집어 못을 뽑아주었습니다. 임꺽정에선 허수아비를 태워주라던데, 불도 없거니와 산불날까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짚을 구하지 못해서인지 발에 쓰인 갈대를 뽑아 만든 것 같았습니다. 검은 천으로 싸고 붉은 끈으로 묶었군요. 머리 쯤 되는 곳에 못을 박았는데, 허수아비 뒤에 종이봉투 하나가 같이 박혀 있었습니다. 테잎으로 꼼꼼하게 봉한 것을 찢어보니[이때 뭔가 끔찍한게 들어있으면 어쩌나 싶었습니다만], 컴퓨터에서 뽑은 듯한 여자사진이 찢어발겨진 채 들어있습니다. 그 뒤에 쪽지 하나가 들어있네요. 펼쳐보니 주소와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경면주사같은 것은 구하기 힘들었는지 분홍색 펜으로 썼군요. 부천에 사는 박선영이란 사람이네요[정확한 주소를 밝히지도 않았고, 워낙 흔한 이름이니 괜찮겠죠? 이 사람이 범죄를 지은 것도 아니구요] 글씨를 보니 여자가 그런 것 같습니다.
더 어찌해야할 지를 몰라서 그냥 버려두고 왔습니다.

그 산에는 무속인 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 하나가 몇년 째 주문같은 것을 외우고 있습니다. 그 아줌마가 그랬나? 큰 길에서 얼마 안들어간 곳에 박아둔 것을 보면 산에 자주오는 사람이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경면주사도 아니고 분홍색 펜으로, 사주팔자도 없이 주소와 이름만 적은 쪽지를 보면 무속인이 한 짓은 아닙니다.

그냥 지나갈 걸 괜한 짓 했나 싶기도 합니다만....
부천에 사는 박선영이란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09년 8월 3일 월요일

중국감옥에 수감중인 한국인재소자들에 대한 기사를 보고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09/08/03/0503000000AKR20090803063700097.HTML?template=1010
오늘 언론에서 본 재미있는[?] 기사입니다. 한-중간 수형자이송조약이 발효되었지만, 한국인 재소자들이 중국 감옥을 선택한다는 내용이죠. 이 기사를 읽은 사람들이 달아둔 덧글들을 보니, 몇가지 잘못 아는 것이 있는 듯 해서 좀 적어볼까 합니다.

저는 경비교도대 출신입니다. 한마디로 전의경 비슷한 것인데, 감옥에서 군복무를 하는 것이죠. 제가 제대한 지 오래되서 기억이 잘 안나는 것도 있고, 요즘은 바뀐 것도 있을 겁니다. 잘 아시는 분 계시면,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주시길 바랍니다.


1 먼저 한국은 재소자들에게 강제노역을 시켜서 안돌아온다고 하는데, 그건 아닐 겁니다.
보통 강제노역하면 80년대 반공만화에 나오는 것 같은 혹독한 고역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아닙니다.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고[징역과 달리 일을 시키지 않는 형벌]를 선고받은 재소자들도 출역을 나가려고 신청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 안에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고 갑갑하거든요.


2 중국의 감형제도를 좋게 평가하고 있군요. 저도 한번쯤 고려해볼만한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그런 역할을 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바로 가석방이죠. 우리의 가석방제도가 그리 뒤떨어진 것 같지는 않군요.

다만 이와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감형 또는 가석방제도의 자의적 운영과 부패문제입니다. 감형/가석방은 결국 재소자에 대한 평가문제를 전제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 담당 공무원이 자의적으로 평가를 한다면, 또는 뇌물을 받는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물론 여러가지 정형화된 기준을 세워 자의적인 처분을 방지하겠지만, 그런 기준들이 얼마나 명확할 수 있는지도 문제겠죠. 예컨대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마쳤는지는 명확한 기준입니다만, 반성하고 있는지, 재범의 우려는 없는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결국 감형/가석방 제도의 운영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가진자가 합법적으로 감옥을 나오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도 그다지 사정이 좋아 보이지 못합니다만, 중국이 우리보다 나을지는 모르겠네요.


3우리나라 감옥은 사식반입이 되지 않습니다. '구매'라고 해서 식료품을 사 먹을 수 있습니다만[그냥 매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구매물로 들어오지 않는 음식은 먹을 수 없으니 좀 불편하겠죠. 하지만 이것도 생각해볼 문제가 많습니다. 사식을 허용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가장 먼저 문제되는 것이 반입음식의 부패로 인한 식중독 등의 문제입니다. 특히 여름에 문제가 심하죠. 사회에서는 음식 맛이 이상하면 먹지 않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 주는 밥 먹다가 사식이 들어왔는데, 맛이 조금 이상하다고 먹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더 큰 문제는 흉기/마약 등의 반입 가능성입니다. 어장검 고사 기억하십니까? 물론 요즘은 금속탐지기가 있습니다만, 이것도 금속성 제품만 탐지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금속성 물질만이 흉기 또는 탈출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이죠. 재소자들이 비닐봉지를 모아서 철격자[감방의 쇠창살]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껌은 중요한 탈출도구가 되지요. 팬티나 내복바지의 고무줄로 누워서/앉아서 목을 매 자살하는 일도 있구요. 제가 근무할 때 재소자 하나가 10센티미터도 못되는 쇳조각을 구해서 날을 세운 뒤, 교도관을 인질로 잡은 적도 있습니다[어떻게 가능할까 싶으시겠지만, 방심하고 있는데 목에 들이대면 대책 없습니다].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별별 물건들이 흉기나 탈출도구로 이용가능하므로, 어떤 종류의 물건만 위험물품으로 지정해서 반입을 금지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음식속에 어떤 물건이 어떻게 숨겨져 들어와, 어떻게 쓰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란 것입니다.

더구나 음식물 속에 숨긴 마약은 가려내기가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살가능성입니다. 재소자들은 우리사회에서 가장 극렬한 이해관계 대립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들일 것입니다[요즘 세상에 감옥보낸 사이보다 더 험악한 사이가 얼마나 될까요].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감옥에 있는 재소자를 독살하려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물론 그 가능성은 낮겠죠. 하지만 전국에 있는 재소자의 숫자도 그만큼 많습니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보면 독살사건이 끊임없이 터질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4중국 감옥에서 텔레비전 시청과 흡연이 가능하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했군요.
우리 감옥의 경우, 제가 있을 때는 텔레비전 시청이 특별한 경우에만 인정되었습니다만,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달라졌다는 언론보도를 본 것도 같은데..

흡연의 경우 우리 감옥에서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흡연자들에게는 고통스럽겠죠.
하지만 우리 감옥에서 금지시키는 것도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화재발생 위험입니다. 감옥은 그 구조상 안에서 밖으로 마음대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감옥에서 한번 화재가 일어나면 대참사입니다. 그래서 감옥에서는 자살/도주/화재를 3대 교정사고라하여 가장 두려워하죠.

재소자들은 생활태도가 그다지 좋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마음대로 담배를 피울 수 있게 되면,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방법으로만 담배를 피운다는 보장은 절대 없습니다. 사동하나에 수십개의 사방이 있고, 사방 하나에 여러 명의 재소자가 있습니다. 이들이 하루이틀 지내는 것도 아닙니다. 담뱃불로 인한 화재가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예전에 불법체류자들이 외국인 보호소에서 화재를 일으켜 탈출을 시도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탈출은 실패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죠. 이게 우리 감옥에서 얼마든지 되풀이 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어떤 제도 또는 그 운영이 우리보다 낫다면, 배워야겠죠.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의 현실이 어떠한지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요?

2009년 6월 25일 목요일

6/25에 떠오른 할아버지 생각

호국영령들을 위한 포스팅을 하나 봤습니다. 그리고 문득 제 할아버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6/25터지고 며칠있다가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되신 분입니다.

제 할아버지께서는 1908년생이셨습니다. 당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동네머슴이셨죠.그런데 증조할아버지께서 -죄송한 말씀이지만-악착같이 돈을 버셨답니다. 장날에 생대추를 사다가 말려서 다음 장날에 팔고, 농한기에는 안면도로 가서 빗자루/소쿠리 따위를 만드는 일도 배워오셨고... 아무튼, 할머니의 친정아버지께서, '저 집에서는 늘 뭔가를 말리고/만든다. 내 딸을 저 집에 시집보내면 밥은 안 굶겠구나'하고는 할머니를 시집보내셨을 정도입니다.

결국 동네에서 밥술 좀 뜨는 집안이 되셨고, 할아버지께서는 대학을 가실 수 있으셨습니다. 동네 머슴이 아들을 대학에 보낸 것입니다. 요즘이야 아무나 대학 갑니다만, 일제시대는 그렇지 않았답니다. 지금으로 치면 외국유학보다 더 알아줬다는군요. 어릴 때는 어른들 그냥 하시는 말씀이려니 했는데, 요즘 외국 유학생 수와 그 때 대학생 수를 생각해보니 틀린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대학에 갈 수 있으셨던 할아버지께서는 학생운동에 뛰어드셨습니다. 그리고 졸업을 얼마 안남긴 1930년에 퇴학 당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알아보셨더니, 광주학생운동 때 중간간부쯤 되셨던 모양입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답니다. 하루는 베를 짜고 있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께서 뛰어오시더니, 종이뭉치를 휙 집어던지고는 도망가시더랍니다. 그래서 그 걸 몸속에 숨기시고 그냥 베를 짜셨습니다. 그러자 바로 순사들이 나타나 할아버지를 뒤쫓아 가더라는군요. 순사들이 사라지고 난 뒤 증조할아버지께 그 말씀을 드리자, 증조할아버지께서 그 문건들을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리셨답니다.

그것 말고도, 어릴 때 할머니께서 고모들에게 조용히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족보를 태워버리셨다고[우리집안이 몰락양반쯤 되었던 모양입니다]-순사들이 족보를 보고 친척들을 잡아족칠까봐.
커서 다시 여쭤보니,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떼시더군요. 뭔가 이상했습니다. 제가 잘못 기억하는 것이라면, 그냥 아니라고 하실텐데... 할머니 돌아가신 뒤, 어쩌다 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누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군요. 할머니께서는 그 일을 감추고 싶으셨던 겝니다. 아마 할머니의 생각에 족보를 태워버렸다는 것은 엄청나게 나쁜 짓이었나봅니다.

제가 어느 곳의 시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운좋게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신조관이 할아버지께서 대전에 계셨냐고 물어보더니, 제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자 말을 돌리더군요. 집에와서 물어보자, 할아버지께서 몇달씩 집에 안들어오셨던 때가 많았답니다. 집에서는 무슨 일인지도 몰랐고. 그 때 기록이 남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소식도 없이 몇달씩 집에 안들어오시는 날이 많아서, 할머니께서 갈라서자는 말씀까지 하셨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졸업이 눈앞인 학교를 퇴학당하니, 증조할아버지께서는 크게 역정을 내셨답니다. 증조할아버지 입장에서는 그럴만도 하죠. 죽어라 고생해서 남들은 꿈도 못 꾸는 대학까지 보내놨는데 그리 되어버렸으니.... 그래서 결국 흥남으로 흘러들어가셨답니다. 고향에서는 순사들 등쌀과 증조할아버지의 역정에 견디기 어려우셨던 듯 싶습니다.
생각해보니, 일제가 북한지역에 중화학 공업을 육성해 흥남에는 공장이 많았던 것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공대생이셨거든요. 그런데 책을 보다보니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함경도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했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좌익이셨는데, 아마 이것도 관계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그곳에서 '세깡가가리'라는 일을 하셨답니다. 일본말인지, 공업계통의 독어/영어가 일본어로 변형된 것인지, 그런 말이 다시 북한사투리로 변형된 것인지....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작업복 입고 하는 일이냐고 여쭤보니, 양복을 입고 다니셨다네요. 손주가 물어보는 것이니 좋게만 말씀하시나보다 싶었는데, 큰고모께서 그곳에서 유치원을 다니셨다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가 봅니다. 비록 중퇴라지만, 공대를 다니시던 분이라 기술이 있으셔서 꽤 좋은 일자리를 얻으셨나봅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고, 다음 해 고향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왜 내려왔냐고 여쭤보니, 할머니께서는 흥남사람들이 남쪽사람이라고 구박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압바치'라고 했다네요. 38선에서 소련군에게 걸려 얻어맞으셨고, 뇌물을 주고서야 넘어오실 수 있으셨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무척 어렵게 사셨다합니다. 베바심[아버지께선 충청도 사투리로 가을걷이를 그렇게 발음하실 때가 있더군요. 벼+바심/바슴입니다. 바심/바슴이 추수쯤 되나봅니다] 때나 되어야 배불리 드셨나봅니다. 공장이든 뭐든 있어야 기술자가 직장을 얻을 게 아니겠습니까.

어릴 때는 그랬나보다하고 넘어갔는데,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네요. 할아버지는 수십년동안 살아온 고향이 어떤 곳인줄 몰라서 내려오셨을까? 처자식까지 딸린 사람이? 게다가 좌익이셨던 분이 왜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오셨을까? 해방 이후 북한에 일어났던 일들을 살펴 봅니다.
소련군이 산업설비들을 뜯어 갔다는데, 할아버지 다니시던 공장도 뜯어가서 일자리가 사라졌나? 그래도 대부분의 설비를 북한이 넘겨받았고 북한 공업이 빠르게 회복되었다니,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도 고급기술자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겝니다. 친일파청산할 때도 과학/기술자들은 건드리지 않았다니까요.
소련군이 진주하고 강간과 약탈이 넘쳐났다는데, 그것 때문인가?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아버지께서는 소련군에 대한 나쁜 기억이 없으십니다. 한겨울에 우린 추워서 벌벌 떨고 있는데 소련군은 찬물로 목욕하던 일/소련군이 말타고 가다가 귀여운 아이가 있으면 말안장에서 먹을 것을 좀 꺼내주던 일 정도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때 어린 아이셨으니까 눈앞에 보이는 일만 아셨으니 그랬겠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좀 다르셨겠죠[아버지께는 악몽이던 80년대를 저는 아름답게만 기억하는 것과 같은 이치겠죠]. 어디에선 소련군들이 무슨 짓을 했다더라, 악에 받친 청년들이 뭉쳐서 소련군을 습격했다더라는 이야기에 불안하셨겠죠.
숙청이 계속되었다는데, 그것도 영향이 없지 않았겠죠. 일제가 물러나 이제 좀 사나 싶더니 여기서 습격하고 저기서 잡아가서, 46년에 이미 북한의 감옥은 꽉 찼고, 많은 이들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죠.
46년 7~8월이 되자, 조만식은 감금되고 박헌영/무정/김두봉/한설야 같은 쟁쟁한 인물들까지 입을 모아 김일성장군을 찬양하기 시작하네요. 9월에는 투표가 이뤄졌는데, 흑백함 투표였다는군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찬성/반대만을 밝혀야 하는....
토지개혁 뒤에는 소련에 식량이 반출되는 바람에 아사자가 속출했다네요.

물론 이런 일들이 모두 할아버지께서 월남하기 전에 또는 월남을 결정하기 전에 일어나진 않았겠죠. 하지만 역사책을 보는 우리와 달리, 그곳에 사셨던 분께서는 돌아가는 꼴이 대강 보였을 겁니다. 어제까지 지상낙원이던 곳이 하루 아침에 막장으로 변해버렸을 리는 없고, 싹수가 보였겠죠.

좌익이셨으니 역사발전법칙을 신뢰하셨겠지만, 이런 꼴을 지켜보는 마음은 참담하셨을 겁니다. 결국 수많은 월남민과 같이, 고향으로 돌아오셨습니다만.... 문제는 남한도 만만치않은 막장이었다는 거죠.

고향에 오셔서 어렵게 사시면서, 좌익활동을 계속하신 것 같습니다. 형제중 가장 똑똑했다던 네째 할아버지께서도 좌익이셨다죠. 사촌동생의 말씀으로는, 할아버지께서 '야산대'[빨치산을 야산대라고 불렀나봅니다]와 관련이 있으셨다네요. 그런데 좀 온건하셨답니다. 변전소 폭파하자고 하면, 그거 나중에 우리가 쓸건데 왜 폭파하냐고 말리는 식이셨답니다.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좌익을 택하신 것인지, 북에서 돌아가는 꼴을 보셔서 그런 것인지, 성격이 부드러우셨는지......

48~49년에 정부와 좌익의 싸움은 격렬했다지요.
할아버지께서는 경찰에 잡혀가셨습니다. 네째할아버지가 자수하면 풀어준다며 잡아갔다네요. 당신께서 무슨 짓을 했다고 잡아간 것이 아닌 걸 보면, 경찰은 할아버지께서 좌익활동하신 것은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 해 북에 계셨으니 경찰이 눈여겨 보지는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별로 열심히 활동하지는 않으셨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처자식도 있고, 북에서 지켜본 것도 있으실테니 열의가 많이 식으셨던 것일까요?
아니, 보도연맹에 가입시킨 걸 보면 좌익활동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보도연맹가입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좌익활동을 눈치 못채고 전력때문에 가입시켰는지도 모르겠네요. 좌익활동을 눈치챘다면 그 죄목으로 잡아갔을테니까요. 보도연맹 가입 후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하셔야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갇혀계실 때, 함께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목을 매자 할아버지께서 구해내셨다네요. 그걸 보고 경찰이 할아버지에게 당신이 저 사람들 관리하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한국전이 터집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할아버지의 동창이 그때 경찰에 있어서, 할아버지는 빠져나오실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창이 있다고 빠져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트럭에 실려 가시면서 웃옷을 벗어서 길가의 농부에게 던져주셨답니다. 난 이제 옷이 필요없는 곳으로 가니, 당신이 쓰라는 뜻이셨겠죠. 지금이야 남이 입던 옷 누가 입겠습니까마는, 옛날엔 흔히들 얻어입고/팔고 했으니까요.

트럭에 실려가는 모습을 여동생이 보았습니다만, 가족들에게 말해주지 않다가 몇해 전에야 큰고모에게 말했답니다. 아마 처음에 무서워서 말을 못했고, 그 뒤엔 말할 때를 놓쳐서 못했겠죠. 그러다가 이제 살날이 얼마 안남았다는 생각이 들자,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는 마음으로 말해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은 큰 고모는 며칠밤을 잠 못드셨습니다. 그때 말해줬다면 시체라도 찾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에. 큰고모는 그걸 왜 이제 말하냐, 이제 말할거면 그냥 말하지 말았어야 하는거 아니냐시네요.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네째 할아버지께 전하자, 네째 할아버지께서 '무어!!' 하고 벌떡 일어나 뛰어나가시던 것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장례식 때 놀고 있자니, 저게 뭘 알겠냐며 어른들이 혀를 차던 일도.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가시고, 집안은 박살났습니다.
아버지 기억으로는 네째 할아버지께서는 권총을 차고 다니셨다죠. 그리고 네째 할아버지 잡기 위해 할아버지를 잡아갈 정도라면, 네째 할아버지는 어느 정도 높은 자리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아무튼 네째할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어지자 사라지셨답니다. 아버지께서는, 만약 무사히 북으로 갔다면 남파되었을 텐데, 남파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돌아가신 것 같다고 하십니다. 책을 보니, 충청도당 빨치산은 도토리부대로 불릴 정도로 약했고, 몰살당했답니다. 생포되었다면 출옥 후 돌아오셨을텐데, 그게 아닌 걸 보면 살아남지 못하신 듯 합니다.

세째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나서셨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처형당하셨습니다. 결국 할아버지 4형제 가운데 둘째할아버지 딱 한분만이 살아남으셨습니다- 어린시절 열병을 잘못 앓아 지능이 낮으신 덕에.

전쟁이 어찌되든 농사만 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할머니도 잡혀가셨습니다. 경찰에서 고문을 했지만 버텨내셨고, 동네에서 지장을 찍어가며 연판장을 돌려 결백을 증명해준 덕에 살아돌아오셨습니다. 그때 잡혀갔다가 살아돌아온 사람이 동네에 딱 둘이었다던가요. 아버지는 온몸이 타이어처럼 시커멓게 되어 돌아오신 할머니를 기억하십니다. 언젠가 할머니께서, 전기고문 받을 때 속이 타서 물을 한 말은 마시고 싶어진다고 말씀하신 것도 기억나네요. 연판장을 돌려주신 분들, 그 혹독한 시절에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텐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뒤 할머니 혼자 7남매를 길러야 했던 집안사정은 뻔했습니다. 7남매 가운데 아버지만 정규교육을 받으셨습니다. 그나마 고등학교 졸업에는 6년이 걸렸다네요. 장학금을 받아 간신히 교대[그 시절엔 2년제 였고, 등록금이 쌌답니다]를 들어가셨고, 큰고모가 식모살이하며 부쳐준 돈으로 하숙을 하셨습니다. 네째할아버지네는 더 고생했답니다. 아버지께서 오랜만에 만났더니, 신앙이 아니었다면 그 시절을 정말 이겨내지 못했을거라-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는군요.

원래 6월25일에 쓰기 시작한 글인데, 틈틈히 쓰다보니 이제야 올리는 군요. 쓰다가 며칠 지나니 귀찮아져서, 그냥 지워버릴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 블로그에서, 후세역사가들을 위해 오늘을 남겨두자는 말씀을 보고 그냥 썼습니다. 오랜 뒤에 사람들이 이글을 보게 된다면, 괜히봤다는 생각은 안들었으면 좋겠네요.

2009년 6월 24일 수요일

이제는 들을 수 있다

어제 라디오에서 업타운이란 그룹의 다시 만나줘라는 노래가 나오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군에서 막내시절, 항상 내무반에 울려퍼지던 노래거든요.

제대하고 처음 그 노래가 라디오에서 들렸을 때, 바로 꺼버렸습니다.
정말 가슴이 벌떡거려서 들을 수가 없었거든요. 또다시 음침한 내무반 분위기[이상하게도, 막사왕고 때 내무반을 생각하면 어두컴컴할 때도 음침하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데, 막내시절 내무반을 생각하면 악몽에나 나타나는 음침한 분위기가 떠오릅니다]에 빠져버리는 듯 했습니다.

그 뒤로도 몇번인가 라디오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만, 그때마다 꺼버렸습니다. 몇년 지나면서 점점 덜해지긴 했지만, 정말 듣기 싫었거든요. 이 노래 들었다가 괜히 군대악몽 다시 꿀 것 같기도 했고.

제대하고 10년이 지난 어제에서야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긴 했지만. 군대악몽 다시 꾸지 않을까 걱정되기는 했는데, 다행히 안꾸었습니다.


얼마전 빠리바게뜨/해피포인트의 군입대 축하[?]광고 때문에 말이 많았죠. 솔직히 그 때, 화는 나지 않았고 정말 웃겼습니다. 뭐랄까.... 자살골을 넣기 위해 죽자살자 뛰어가는 축구선수를 구경하는 기분이랄까요? 아마 저는 영장받았을 때, 그리고 입대할 때 별로 괴롭지 않았으니까 웃을 수 있었을 겁니다. 좀 긴장되긴 했지만, 뭐가 기다리고 있는 줄을 몰랐기[!]때문에 별 느낌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첫 휴가를 나왔다가 복귀할 때- 정말 죽고싶었습니다. 두통/설사/발열/구토가 일어나더군요. 아마 빠리바게뜨/해피포인트에서 첫휴가 복귀를 가지고 같은 광고를 만들었다면, 저도 모르게 쌍욕이 튀어나왔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세월이 약이란 말이 맞나봅니다. 그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다니....

2009년 6월 21일 일요일

골목길정비사업과 동네다툼

저희 동네에는 6m소방도로가 있고, 거기에서 작은 골목이 ㅜ자 모양으로 뻗어 있습니다. 차 한대가 드나들만한 골목이죠. 요즘 노후하수관 교체와 골목길 정비를 위해, 콘크리트 포장을 뜯어내고 공사를 한 다음 아스팔트로 깔끔하게 덮어씌웠습니다.

그런데 골목길 들목[ㅜ자에서 두 선이 만나는 곳]에 있는 집이 모퉁이의 담을 조금 들여쌓아서, 골목길 들목이 조금 더 넓혀져 있었습니다. 많이 넓혀진 것은 아니고, 한팔 길이 또는 한걸음 반 쯤 넓어졌죠.
그러니까, 한쪽이 한걸음 반 쯤 되고 다른쪽이 3m쯤 되는 세모꼴 땅이 골목길에 보태진 셈이죠.

이 땅 때문에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골목길 포장을 하는데, 이 집에서 골목길에 들어오던 차가 담을 들어받을까봐 그 땅에 큰 돌덩어리를 하나 두더군요. 그러자 골목 안쪽에 있는 집 아줌마가 찾아와 한바탕 난리를 피웠습니다[차가 드나드는데 불편해져서 그러는 것이겠죠]. 이 집 딸 머리채 붙잡고 옷을 찢어서 경찰까지 불렀습니다.
그래서 시공사에서는 측량을 하려고 했는데 대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이 집의 뜻대로 그 땅에는 콘크리트 덩어리가 세워졌습니다.

일이 이렇게 끝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뒤로 골목길 안쪽 사람들이 하나둘씩 와서 큰소리를 치기 시작하더군요. 차마 불러내 싸우지는 못하고, 듣거라 하고 큰소리치는 일 있죠?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이 집의 맞은 편, 그러니까 골목길 들목을 이루는 또 다른 집에서 자기들에게도 콘크리트를 쌓아달라고 했나봅니다. 그 집은 담이 없었기 때문에, 집 건물에 한뼘쯤 콘크리트를 덧붙여주더군요.

그러자 이 집의 옆집에서, 연석선이 한 뼘 쯤 자기 땅으로 들어와 있다면서 따졌고, 오늘 그걸 고치는 공사를 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2009년 5월 29일 금요일

비명소리

어제 밤 12시 반 쯤, 자려고 누워있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리더군요.
꽤나 먼곳에서 나는 소리인 듯 해서 그냥 잘 까 그래도 나가볼까 하다가, 창 밖으로 내다 보았습니다. 역시 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안에서 들은 소리라, 어느 쪽인지도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잠시 뒤, 저 앞집에서 누군가 나와 서성이더군요. 바로 앞집에서도 아저씨가 나와서 담배를 피웁니다.

갑자기 안심이 되더군요. 예전에도 밤에 비명소리가 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나가보면, 저 말고는 아무도 없었거든요. 좋은 분들이 이사오신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안보이고 어디에서 난 소린지도 알 수 없어, 다시 자려고 누우니, 저 멀리서 싸이렌이 잠깐 울립니다. 누군가 신고를 해줬나보군요. 별일 아니었길 빌어봅니다.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적어봅니다.

한번은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나더군요.
그 이전에, 비명소리가 들려서 나가보면 아이들이나 여중/고생들이 자기들끼리 장난치면서 지른 소리였던 적이 많았습니다. 이게 눈앞에서 보면서 들으면 바로 아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하도 속아서(?) 낮에는 비명소리가 나도 웬만하면 안나가게 됐죠. 제가 둔해서 그런가 했더니, 저희 어머니께서도 구별을 못하시더군요.

그때도 애들이 소리지르나보다 하고 안나갔습니다. 그런데 계속 들리기에 그냥 또 속는 셈 치고 나가봤더니, 어떤 남자와 여자가 있었습니다. 여자가 지른 소리같더군요.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도 몰랐습니다. 강도에게 걸린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그 때 남자가 여자를 벽에 세게 밀어버리더군요. 그러자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경찰을 부르려고 핸드폰을 꺼내들자, 남자는 가버렸습니다. 몇 번 다시 오려고 했지만, 제가 계속 서있는 것을 보고 아주 가버렸습니다. 둘은 사귀던 사이였는데, 여자가 남자에게 헤어지자고 하자 남자가 화가 나 그랬다더군요. 남자가 작심하고 팬 것은 아니라서, 별로 다치진 않은 것 같더군요.

그런데 이게 만일 강도였다면, 제가 나가기도 전에 일이 끝났을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이들이나 여학생들이 아무 때나 소리지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자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1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실 때는 여러 번 지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사람들은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게 아니거든요. 못 들을 수도 있고, 들었어도 소리가 한번만 나고 더 안들리면, '내가 잘못들었나?' 하고 그냥 있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2 비명을 질러 사람이 나타나면, 다시 도움을 청해주세요.
나타난 사람이 머뭇거리는 것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상황파악을 못해서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이게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제가 겪어보니 그렇더군요. 남자가 두들겨 패고, 여자는 나뒹굴고 있으면 바로 상황파악이 되지만, 그냥 둘이 서 있으면 [처음부터 보는게 아니라 그때부터] 보는 사람은 모릅니다.

3그리고 웬만하면 밤늦게 다니시지 않는 게 좋겠죠. 밤늦게 다니지 말라고 하는 것이 여성에 대한 부당한 속박쯤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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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0시 30분쯤 자려고 누웠는데 또 비명소리가 났습니다. 그냥 잘까 하다가, 그다지 먼 곳에서 난 소리같지 않아서 창밖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무 것도 안보이더군요.
옷 입고 안경 찾아 쓰고 나와 보았는데, 아무도 안나와있더군요. 비명소리가 좀 짧게[1~2초 남짓?] 나서 그런게 아닐까 싶네요. 집 근처를 훑어보았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어서[조금 떨어진 곳이나 건물 안에서 그랬나 봅니다] 그냥 돌아와 잤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별일 없었길...

8월 2일 04시50분 쯤 또 비명소리가 났습니다. 그냥 놀란 소리 같기도-자다가 들어서 확실치 않아요- 했습니다만, 오토바이소리까지 나길레 나가봤습니다. 역시 아무 것도 없더군요. 새벽이라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난 소리가 가까이서 난 것처럼 들렸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