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6일 토요일

가족의 의미

1. 결혼이민자들이 각종 민원 때문에 저희 사무소에 많이들 오십니다.

우리나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분들은 주눅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죠. 낯선나라 관청에 왔으니까요. 하지만 아주 당당한 분들도 계십니다. 바로 아이를 데려온 엄마들이죠. 우리나라에 시집을 와서 아이까지 낳았으니 우리나라 국민이 될 자격이 충분하신 분들이고, 그 때문인지 전혀 꿇리는 기색없이 당당하십니다.

제 동료가 그러더군요. 허구헌 날 위장결혼 조사하다가 저런 사람들 보면 고맙다고. 저도 그랬습니다. 실태조사 때문에 가정을 방문할 때, 문 열고 들어가는 순간 따뜻한 가정의 분위기가 확 풍겨나오는 집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동거가 명백하다는 말 밖에는 보고서에 뭐라고 쓸 것도 없죠.

아무튼, 엄마는 아이 때문에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2. 어떻게 해서든 우리나라에서 오래 머물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이 많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오신 분들이 많이들 그러시죠. 우리나라에 친지가 있으면 병간호나 산후조리 등을 구실[핑계인 사람은 티가 납니다]로 눌러앉아 보려 하기도 하고, 젊은 여성들은 어떻게든 우리나라 남자와 결혼을 하려 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께서 먼나라에서 오신 인척을 데려오셨습니다. 체류기간 연장신청을 하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핑계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더군요. 그 나라에서 오신 분은 처음 뵙길레, 왜 한국에 머물려고 하냐고 물어봤습니다. 데리고 오신 분께서 무심코 그러시더군요. 그 나란 워낙 못살아서 여기가 낫다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우리나라 남자와 결혼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시더군요. 저런 분들이 결혼에 성공하고 우리나라에 머물게 되면, 한마디로 남편 뒤에 숨어버리죠. 대개 아이는 낳지 않구요.

아무튼 저런 여자에게 남편은 방패막이가 됩니다.


3. 신분세탁을 한 사람을 잡았습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잡아떼더군요. 저희가 가진 증거가 명백해서 벗어날 수 없는 사안이었는데도. 물론 그 사람은 그런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만.
증거를 들이밀기 전, 별 생각없이 한 마디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당신 아내와 어린 아이도 있지 않느냐. 그 사람들 당신 하나 믿고 와 있는데, 당신이 잘못되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 인정할 건 인정하고 선처를 구해야지. 왜 자꾸 일을 키우려 드느냐.

그 말을 듣자, 갑자기 고분고분해지면서 불더군요[물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자백하는 머리는 쓰면서두요]. 모든 일에서 아주 협조적이었습니다. 혹시 내 말이 협박으로 들렸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 두들겨패진 않으니까 안심하라고 했더니, 씩 웃더군요. 겁을 먹은 눈치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 써보라고 했더니, A4용지 몇장을 빽빽하게 써내려가더군요. 우리나라에 와서 가난과 무시 때문에 고생하며 공부했고, 이제 제대로 된 기술자로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손가락 하나가 짧은 걸 보니 무슨 고생을 했을 지 훤하더군요.
우리나라에 와서 공부할 때 돈을 대준 사람이 전화로 하소연하고 한국인 직장동료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걸 보니, 사람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분세탁만 아니었으면 코리안드림의 모범사례가 될 사람이라는 생각에 저희들도 참 안타까웠습니다.

원래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로 사법처리를 해야할 사안입니다만, 강제퇴거만 하기로 했습니다. 감옥에는 가지 않고, 보호소에 머물다가 임금정산과 항공편 구매 등 신변정리가 끝나는대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죠. 아마 아내와 아이는 한발 앞서서 돌아가 기다리고 있겠죠.
배운 기술을 그 나라에서 써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 나라에 관련산업 기반이 닦여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뭘 도울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저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적어도 지금은.

아무튼 남자는 처자식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순순히 자백하기도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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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입니다.
제 윗분께서, 이 사람이 우리나라에 머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사람을 위해서 우리나라에서 다닌 학교/직장 사람들이 다 나섰더군요.
저희도 이 사람이 계속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또는 그 나라와 우리나라를 오가며, 관련 산업에서 활약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런 친구 하나 잘 키워두면 우리 기업이 그 나라에 진출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아마 직장에서도 그래서 나섰겠죠].
서른도 채 안되었고 머리도 좋은 듯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코리안드림을 이루든,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관련산업을 일으켜 세우든, 앞으로 큰 일을 해주길 빌어봅니다.

2011년 3월 5일 토요일

개밥

나와살다 보니, 가끔 집에 오면 달라진게 눈에 띄곤 합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건강을 위해 잡곡밥을 하십니다. 그런데 집에 오니 흰 쌀밥이 따로 있더군요. 이건 뭔가 싶었는데 개밥이라고 하십니다. 개사료가 쌀보다 비싸서 그냥 쌀밥을 주게 되었다네요. 물론 싸구려 사료도 있지만, 쓸만한 사료는 쌀보다 비쌌던 모양입니다.
사람은 잡곡밥을 먹고 개는 백미밥을 먹는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보셨으면 절대 이해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1908년생이셨던 할머니께서는 개에게 하루 세끼를 준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셨으니까요.

저희 아버지 어릴 때[1940~50년대]는 개밥이라봤자 고구마껍질 정도였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어릴 때[80년대]는 먹다 남긴 밥을 주었습니다. 가끔씩은 쌀값 아깝다고 쌀집에서 싸래기[요즘은 마트 등에서 쌀을 사니 쌀집이 거의 없습니다만, 예전에는 다들 쌀집에서 사먹었죠. 쌀집에서 싸래기는 싼값에 따로 팔았습니다]를 사고, 생선가게에서 버리는 생선대가리를 얻어다가 개밥을 해주기도 했죠.

음... 단 몇십년 사이에 참 많은 것이 바뀌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