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4일 토요일

만삭의 불체자

불체자부부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나갔습니다. 여기저기 물어보니 아내쪽이 만삭이라네요.
같이 간 분께서 '이번에는 좀 합법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시더군요[불체자라는 신고받고 가보면, 합법체류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그냥 허탕치고 돌아오죠]. 불체자라면 눈에 불을 켜고 잡으시는 분인데, 그 말씀을 하시면서 스스로도 놀라워하시더군요.

아니었으면 했는데, 역시나 불체자였습니다. 아내는 배가 잔뜩 불러서 산부인과에서 받은 수첩까지 보여주네요. 막달이랍니다. 이를 어쩐다?
그 분께서, 아내는 안걸린 것으로 해 줄테니까 자진출국을 하라고 얘기해줬습니다. 그게 가장 낫다고. 우리말을 몇마디씩만 하는 남편과 거의 못하는 아내에게 이걸 설명해주느라 애먹었는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에게 돈 받을 거[체불임금 같은] 있냐고 물어보니, 다행히 방 보증금 말고는 없다네요. 아무튼 보증금도 돌려받아야 하고, 아내가 만삭이라 비행기를 못타니 바로 나갈 수가 없답니다. 결국 아내는 남겨두고 남편은 데려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아내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면서 아내도 같이 데려가달라는군요. -_-;;
보호실이나 보호소가, 어떤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것처럼 인간이하의 생활을 강요하는 곳은 아니지만, 만삭의 임산부에게 내집같이 편안한 곳은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있을 수도 없구요. 그걸 얘기 해주고[제대로 알아 들었는지는 모르겠네요] 남편만 데리고 나오는데 또 애먹었습니다. 울먹이는 아내를 남편이 달래게 한 다음, 수갑은 아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채우고 데려왔습니다.
아까 만삭의 임산부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분께서, 걱정스런 눈길로 꼭 데려가야 하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잘 될거라고만 말하고 왔습니다.

원래 단속된 불체자는 핸드폰을 못 쓰게 하는데, 이 사람은 그냥 쓰게 놔뒀습니다. 가면서 계속 아내와 통화를 하더군요.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만, 말투와 목소리로 봐서 아내와 통화하는 것이란 걸 알겠더군요.
가면서 우리끼리, 이걸 어쩌냐, 보호일시해제를 해야하는 거 아니냐, 소장님에게 말해야 하지 않겠냐 말이 많았습니다. 제가 그 나라 대사관에 아내를 돌봐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게 어떻겠냐고 했습니다만, 별 소용없을거란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보다도 못사는 나라 외교공관에서 이런 일까지 나서줄 리가 없다고.
그 사람에게도 몇번이나 당신 정말 친구 없냐, 아는 사람도 없냐, 있으면 전화라도 해보라고 했습니다만, 친구라고는 저 먼 곳에 하나 있어서 도와줄 수가 없답니다.

보호실에 다른 외국인과 함께 있기 때문에, 보호실에 들어가기 직전 핸드폰을 받아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시 전화를 하게 해줬죠. 혹시나 싶어서 그 나라 대사관의 전화번호도 적어줬습니다. 대사관에 전화하면 나갈 수 있냐고 묻더군요. 그건 아닌데, 같은 나라 사람이니까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나 보라고 말해줬습니다. 전화를 했는지는 모르겠네요.
전화통화는 다른 보호외국인들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데리고 나와서 시켜줬습니다만, 다른 보호외국인들이 대강 눈치 챈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저놈들은 뭘 받아처먹어서 쟤만 잘해주나 하는 눈으로 쳐다보더군요.

이 사람들도 우리가 모질게 굴지는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임신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 핑계로 더 버텨볼 수는 없을까 궁리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아내는 자신에게 유리한 진단서를 떼러 아주 멀리까지 가는 모양이더군요. -_-;; 놀라서 아기가 일찍 나올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를 신고한 분에게서 항의전화가 왔습니다. 왜 안잡으러 오냐고. 단속을 나가서 남편은 데려왔고 아내는 만삭이라 놔둔거라고 말씀드리자, 만삭이라고 봐주는게 어디있냐 따지고는 남편은 확실히 잡아갔냐고 다져 묻더군요. 저와 함께 가셨던 분께서 해명하느라 애먹으셨습니다. 웬만하면 저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데.... 불체자 부부는 순박해보였습니다만, 저희앞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군요. 불체자 부부가 그 분께 무슨 나쁜 짓을 했다면 그런 사정을 말씀하셨을텐데,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사이가 나쁜 것 같더군요.

결국 불체자 부부가 출국명령을 받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된 듯 합니다. 출국명령은 출입국관리법 68조에 따른 것입니다. 남편은 풀어줄테니, 정해준 날자까지 한국생활 정리하고 제발로 나가라는 것쯤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떤 분은 불쌍한데 그냥 여기서 살게 하면 안되냐고 생각하실테고, 다른 분은 왜 확실하게 잡아서 내쫓지 않냐고 생각하시겠지만, 제가 보기엔 괜찮은 마무리 같습니다. 임신했다고 아예 눌러앉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이고, 가둬뒀다가 쫓아내는 것 보다는 남편이 아내 돌보면서 한국생활 정리할 기회를 주는게 나을 것 같거든요.

많은 분이 모르시겠습니다만, 가끔씩 저희가 병든 불체자를 도와준 일이 미담으로 홍보되기도 합니다. 이 곳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저도 생 거짓말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겪어보니, 생거짓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불체자 부부와 태어날 아기는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요? 그나마 인정을 쓰더라고 생각해줄지, 임신 막달인데도 남편 잡아가더라고 욕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 부부를 신고한 사람과 남편이 전화쓰는 것을 눈치챈 다른 불체자들은... 저희 욕을 아주 많이 하고 있겠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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