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4일 일요일

판결이 세상을 바꾸기도 할까요?

예전에 어느 법조인이, 판결이 세상을 바꾼다는 제목의 책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광고에서 제목을 보고 허풍이 꽤 세구나 싶었죠. 그런데 요즘 생각이 좀 달라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가스호스를 뜯어내며 난동을 부리던 사람에게 경찰이 가스총을 쏜 일이 있었습니다. 가스총에서 튀어나간 고무마개가 그 사람의 눈에 맞았고, 눈을 잃게 되었다죠. 그에 대해 법원은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했구요.

제가 일하는 곳에서는 불체자단속 때문에 가스총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사건 때문인지, 가스총 사용수칙이 비현실적으로 되어 있더군요. 일정거리 안에서는 얼굴에 쏠 수 없게 정해져 버린 것 입니다. 가스총은 최루가스를 눈/코/입에 확 뿜어야만 하는데, 그걸 못하게 되었으니 있으나 마나하게 된 거죠.
가스총 말고 다른 보안장비라봐야 삼단봉 정도 입니다. 가스총보다 더 위험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사용에 부담이 더 큰 물건이죠.

자, 다음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불체자 단속에 나가는 사람들이 보안장비의 사용을 꺼리게 되었습니다[물론 불체자 단속에 항상 저런 것들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불필요할 때가 더 많죠]. 어떤 분은 일선직원들에게 가스총이나 삼단봉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는군요. 가지고 있으면 쓴다나요?

그러다보니, 흉기를 들고 공격하는 불체자는 단속이 어려워져 버렸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흉기를 들고 공격하는 불체자를 단속하다보면 부상자가 나올 수 밖에 없는데, 내가 다치면 내 몸이 아프게 되고 불체자가 다치면 골치가 아프게 되버리는 거죠.
흉악한 놈 잡는다고 뭐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문제만 잔뜩 생길 일을 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니 흉기를 들고 공격하는 불체자는 도망가게 내버려두고, 별다른 저항이 없는 불체자만 잡게 되죠. 결국 흉포한 불체자는 남고 온순한 불체자는 쫓겨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건 불체자들에게 흉기를 들고 다니라고 가르치는 꼴이 아닐까요?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물론 그 판결을 한 판사들 입장이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닙니다. 눈이 멀었으니 불쌍했겠죠. 그리고 국가배상책임만 인정했지, 그 경찰관에게 구상책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니까 괜찮을거라 생각했을테구요.
솔직히 공무원들이 법을 잘 몰라서 몸을 사리는 것 아니냐고 되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행정법상 법원의 판결에 대한 국가배상책임 인부와 관련된 논의를 지켜보면, 공무원들이 법을 몰라서 저렇게 되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드는군요.

일이 어떻게 흘러갈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판결이 세상을 바꾸긴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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