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5일 토요일

투표

얼마전 대선이 있었습니다. 선거때마다 세대별 투표율이나 투표성향으로 말이 좀 있었죠.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저희 사무소에 1930년대 태어나신 할머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젊어서 간호사로 서독에 일하러 가셨던 분인데, 은퇴 후 고국으로 돌아오신 분이시더군요. 오셔서는 '국적회복'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다른 국가의 국적/시민권을 얻으면, 우리 국적은 원칙적으로 없어집니다. 이 분께서는 독일시민권을 취득하였으니 우리 국적을 잃으신 것이죠. 이런 분들이 다시 우리나라 사람이 되려고 할 경우, 일반적인 '귀화'가 아니라 '국적회복'에 해당하게 됩니다. 이 분께서는 바로 이 '국적회복'을 하고 싶어하셨습니다.
나이들어 고국으로 돌아왔으니 다시 한국인으로 살겠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만, 이런 경우 조금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국적회복을 하면, 이전의 다른 나라 국적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 나라에서 연금 기타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더군요. 나라에 따라/상황에 따라 다를테니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그런 일이 꽤 많은 듯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정부에서도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 복수국적[이중국적]의 예외적 인정입니다. 65세이상의 고령자가 영주귀국을 할 경우 예외적으로 복수국적을 인정해서, '외국국적 불행사 서약[특별한 것은 아니고, 한국에서는 한국인으로만 살겠다. 불리할 때 외국인행세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것입니다]'이란 것을 하면 그 나라 국적을 버리지 않아도 되죠.

다만 이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복수국적을 인정해준다는 것 뿐이지, 그 나라에서 우리의 국적회복을 어찌 다루는 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그 나라의 주권이 걸린 문제로 우리 정부가 전혀 손을 댈 수도 없죠.
그 나라에서 복수국적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한국국적을 다시 얻었으니 자국 국적을 없애버리게 됩니다.
그 나라에서 복수국적을 인정한다고 하여도, 미국법상 denaturalization 과 같은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저도 아는 게 없습니다만, 미국의 경우 시민권을 취득(naturalization)한 뒤에도 일정한 경우에는 시민권을 박탈(denaturalization)해버립니다. 여러가지 사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원국적의 회복도 사유가 되는 듯 하더군요]--바로잡습니다. 원국적의 회복이 denaturalization의 사유가 되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책을 다시 보니 그 내용을 찾을 수 없네요. 아마 제 기억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잘못된 글을 썼네요.  죄송합니다.--

그 나라 국적은 유지할 수 있다고 하여도, 연금 등 사회보장 수급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국적의 회복이 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저희로서는 알 수 없지요. 다만 어느 나라든지 돈 나가는 것은 싫어한다는 것, 영주귀국/국적회복은 그 나라에서 돈을 주지 않을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담당자분께서 그 할머님께 모든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이대로도 우리나라에서 사시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으시다는 것, 국적회복은 복잡하고 기간도 여러 달 걸린다는 것. 국적회복을 하셨을 때 독일 쪽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우리 정부는 거기에 어떤 도움도 드릴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 할머님의 뜻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독일시민권 없어져도 좋고, 독일쪽 연금 날려도 좋답니다. 까닭은? 아주 간단하고도 확고했습니다. '다시 투표해야겠다'

순간, 서독으로 간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서독에 온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붙잡고 울던 이야기가 생각나더군요. 이 분께서는 어디에 투표하실까요. 그리고 이분께 투표권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 아버지께서는 아마 반대이실 겁니다.
일흔이 넘으신 분이십니다만, 어릴 때 단지 '빨갱이 아들'이란 이유로 길가다가 얻어맞던 일을 잊지 못하십니다.
다른 형제자매의 희생 덕에 7남매 중 유일하게 정규교육을 받으실 수 있었습니다만, 취업을 하려니 갈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요즘은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졌습니다만, 옛날에는 웬만한 회사 구인광고에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없는 자'란 요건이 빠지지 않았거든요. '빨갱이 아들'이 그런 게 될 리 없지 않습니까. 가난 때문에, 자신의 졸업을 위해 다른 6남매가 국민학교 2학년만 마치고 작파한 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아버지께, 이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결국 아버지께서는 교사가 되셨습니다. 요즘이야 공무원/교사의 인기가 높습니다만, 그 때는 '할 것 없으면 면서기하고, 면서기도 못하면 선생한다'는 시절이었더랍니다. 그런데 교사가 된 뒤에도, 그 문제는 끝까지 발목을 잡았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는 평교사 바로 위에 '주임교사'란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주임교사가 되려해도 비밀취급인가가 필요했다네요. 물론 '빨갱이 아들'에게 그런게 나올 리 없었고, 승진은 아예 남의 일이었죠.
아버지께서는 단 한번도 여당에 표를 줘 보신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께 투표권은 어떤 의미일까요.

노인들의 투표성향에 대해, 젊은 사람들의 말이 많습니다.
저 또한 30대 중후반으로 세상 많이 겪어보진 못했고 별다른 고생없이 자랐습니다만, 저보다도 더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내 뜻과는 다르게 투표한다고 해서, 악담을 퍼부을 일은 아닙니다. 그 분들의 투표에는 나름의 가슴아픈 사연이 새겨져있다는 것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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